유월절 어린양 (출애굽기 12:21-28)

을미년 양의 해가 밝았습니다. 을미년하면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인 1895년에 일어난 을미사변을 기억하게 됩니다.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마우라’가 동원한 낭인들에게 고종의 황비인 민비가 살해당하였지만, 일본은 대원군과의 갈등 속에서 조선이 저지른 범행이라는 억지주장을 펼쳤습니다. 을미사변은 이 땅에서 러시아를 몰아내고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겠다는 정치적 야욕으로 비롯된 것이었지만, 한나라의 국모가 살해당했음에도 일본에게 항거하지 못했던 당시의 조선은 국호는 있되 진정한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던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60년이 흘러 또다시 을미년을 맞이했지만, 1955년은 6.25전쟁의 참상이 그대로 남아있는 폐허와 절망의 조국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다시 60년이 흘러서 2015년 을미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120년 전과 60년 전의 을미년을 비교해보면, 오늘 우리는 기적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경제규모 세계 11위에 국민소득은 3만불을 바라보고, 개발원조위원회(DAC)에도 가입해 세계 최초로 원조를 받았던 국가에서 원조를 베풀어주는 놀라운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급속한 성장에 따른 그늘진 모습도 존재합니다. 사회적 건강수준을 보여주는 자살사망률은 OECD 국가 중 가장 높습니다. 노인빈곤율과 산재사망률도 OECD 국가 중 1위이며, 출산율은 세계 최하위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경제지표는 양호한데 사회지표는 불량하다는 것입니다. 불량한 사회지표가 표출된 한해가 바로 작년이었습니다. 무수히 많은 생명들이 바다에서 죽고 군에서 죽었던 것은 성장지상주의로 가려진 도덕과 윤리의 부재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지난 9월 제 99회 총회는 우리 교단의 총회는 “하나님과 세상 앞에 참회하는 교회”라는 주제를 선정하였습니다. 탐욕과 이기심에 빠진 이 사회를 건져내자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양띠해를 맞아 유월절 어린 양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 앞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하나님은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해내기 위해서, 초태생의 죽음이라는 심판을 내립니다. 애굽땅의 처음 난 것들을 모두 멸하겠다는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를 피하기 위해서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대문에 뿌리라고 합니다.(출 12:21-23) 그날 밤 죽음의 기운은 양의 피가 없는 애굽의 집에으로 들어가 모든 초태생을 죽이게 됩니다. 애굽 전역이 장자를 잃은 통곡으로 가득차자 마침내 바로는 이스라엘백성을 풀어 줍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한 하나님은 이 구원과 해방의 날을 유월절(逾越節,the Passover) 이라고 명명하셨는데 이는 곧 하나님의 심판이 지나가고(passover)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첫 유월절로부터 3500년이 지난 유월절에 또 하나의 어린양이 해방과 구원을 위해 피흘려 죽었습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마 26:1-2)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려 돌아가신 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한 유월절 어린양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가장 약하고 순한 동물인 양을, 그것도 어린 양을 택하셔서 이스라엘을 구하시고 나아가 모든 인류를 구원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낮은 모습으로, 약함으로 세상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강함을 추구하는 세상의 승리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어린 양으로 세상을 이기고, 어린 양으로 포로된 자를 구하셨습니다. 이는 곧, 우리에게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를 낮추고 나를 비우는 겸손의 모습으로 상처나고, 부서진 세상을 보듬어 가야 할 것입니다.

이어서 어린 양의 피를 뿌려 구원했다는 것은 희생을 의미합니다. 희생은 단순하게 말하자면, 내가 한번더 손해보는 삶을 말합니다. 나는 절대로 손해보지 않겠다는 이기심이 팽배할 때, 우리 사회는 더욱더 차갑고 경직된 사회로 빠져들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양보와 희생의 삶은 세상을 따뜻하고 살맛나는 곳으로 변화시킵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을미년 새해에는 유월절 어린양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겸손과 양보의 삶을 살아감으로, 하나님과 세상 앞에 부끄럽지 않는 모습으로 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