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빈 그물을 채우는 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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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한성수 목사 |
설교일 | 2016년 9월 4일 |
본문 | 요한복음 21:1-6 |
베드로를 포함한 일곱 명의 제자들이 디베랴 호수로 물고기를 잡으러 나섰습니다. 디베랴 호수는 갈릴리 호수의 별칭으로, 갈릴리 지역의 수도가 디베랴였기 때문에 갈릴리 호수를 일명 디베랴 호수라 부르기도 했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갈릴리 호수로 물고기를 잡으러 간다고 하니 도마와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두 제자가 함께 따라 나섰습니다. 세베대의 두 아들은 야고보와 요한을 가리키고, 또 다른 두 제자는 빌립과 안드레로 추정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핵심 제자들이 베드로를 따라 물고기 잡이에 나섰던 것입니다. 왜 제자들은 세속의 바다로 물고기를 잡으러 나선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 때문이었습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최근에 있었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저들로 하여금 한없는 절망과 좌절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 번이나 나타나셨음에도 저들은 마음속에 예수님의 부활을 담아 두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생각과 경험으로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기에,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들이 첫 부르심을 받기 전, 과거의 생업이었던 어부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 없이, 갈릴리 바다에 배를 띄우고 그물을 던졌던 그날의 고기잡이는 어떠했습니까?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하는 흉작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빈 그물로 새벽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날이 새어 갈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바다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빈 그물로 밤을 새웠던 제자들에게 말씀합니다.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제자들은 “없나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제자들은 주님을 버리고 세상 바다로 갔을지라도 예수님은 저들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밤새도록 수고하였지만, 빈 배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좌절과 실망의 순간에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는 것은, 우리의 고난의 삶 속에 함께 하시는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다 잃어버린 마지막 순간에, 더 이상 이 바다에서는 건질 것이 없다라고 포기하는 그 순간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우리에게 고기가 있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믿고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는 새벽을 맞도록 수고하는 고단한 삶 속으로 다가오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삶을 위로하고 그 삶을 붙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네게 물고기가 있느냐”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나는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고백하면서, 예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때에 잠든 새벽을 깨우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제 계속해서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기로 합니다. “밤새껏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다”고 하소연 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요 21:6) 밤새도록 갈릴리 바다를 샅샅이 뒤집어 그물을 던졌던 제자들은 배 오른편에도 분명 그물을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물을 들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그물에 물고기가 가득 찼습니다. 절망과 좌절의 새벽이 기쁨과 희망의 순간으로 변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물을 배 오른쪽으로 던진 행위”를 순종이라고 해석합니다. 내 삶의 고난 가운데 오신 예수님, 그 예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였더니 빈 그물이 가득 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봅시다. 과연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졌습니까? 그렇게 살아왔습니까? 그래서 던지는 그물마다 물고기가 가득 찼습니까? 주님께서는 분명,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고 하셨건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물을 오른편으로 던지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내가 밤새도록 그곳에 그물을 던져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한 쪽으로 듣고 흘리고 맙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한 조건을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경험과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자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실 때에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에 그들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마 4:18-20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그리고 오늘 베드로와 함께 한 야고보와 요한은 어떻습니까? 그들도 역시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였습니다. 마 4:21-20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0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서두에 나열한 일곱 명의 제자 중 네 명이 모두 어부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밤새도록 시행착오를 하였던 그 바다에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갈릴리바다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들이었지만, 그들은 지난날의 모든 인간적인 경험과 지식을 다 버렸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앞세웁니다. 자신의 세상 지식을 우선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이미 다 경험하고 알고 있는 하찮고 시시한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그러한 교만한 생각으로는 결코 그물을 배 오른 쪽으로 던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삶에는 그물이 가득 차는 은혜의 역사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의 위대한 점은 바로 이 순종의 비결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세상 지식과 권세로 무장하였던 바울은 이 순종의 비결을 깨닫게 되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세상자랑이 복음을 방해하는 배설물로 알고버렸다고 고백합니다. 빌 3:4-9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태어난지 팔일만에 할례받은 정통파 유대인이며, 사울 왕의 후손인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을 능가한 내가, 그 자랑스럽고 유익하다고 여겼던 모든 세상 것들을 이제 해로운 것으로 여겨 냄새나는 배설물처럼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육적인 자랑을 버렸더니 예수를 아는 지식을 얻게 되고 예수 안에서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갈릴리 어부 출신인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이,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을 배 오른편으로 던졌다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적인 자랑과 유익을 모두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버리지 아니할 때, 복음은 뒤로 사라지고 인간의 생각이 앞서게 되고 무익한 말만 무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과 경험과 지식보다 주님의 말씀을 먼저 앞세우고, 주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것으로 알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방법은 쉽고 단순하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지 못했으니, 새로운 물길을 찾아 더 깊은 바다에, 그리고 시간대는 물고기가 가장 많이 활동하는 최적의 시간에 맞추어 그물을 던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렵게 풀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높고 고상한 것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야 말씀에 권위가 서고 신령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단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말씀을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와서 말씀을 들을 때에, 하늘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제의 모교회가 어떤 이단으로 크게 흔들렸던 때가 있었는데, 그 곳에 성경공부를 다녀온 교인들마다 신비한 무엇을 듣고 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교주가 들려주는 말씀테이프에 호기심을 가지게 합니다. 그 이단은 수준별로 말씀을 녹음해서, 얼마동안 성경공부에 참여한 자에게만 다음 단계의 테이프를 줍니다. 그리고나서 사람들에게 더 깊은 비밀을 깨닫게 해주겠다고 유혹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심령골수를 쪼개는 것이지, 어찌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쪼개고 나누는 것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한 행위는 모두 거짓입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쉽고 단순합니다. 그냥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면 됩니다. 그리하면 그물이 가득차게 됩니다. 가나의 혼인잔치를 봅시다. 혼인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은 어떻게 포도주를 만들어 주셨습니까? 집 입구에 있는, 손과 발을 씻는 돌 항아리에 물을 부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물을 다시 떠서 잔치손님들에게 가져다주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대로 했더니, 잔치 맡은 사람이 그 맛을 보고 가장 맛있는 포도주가 이제야 나왔다고 칭찬합니다. 요 2:7-10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무슨 최상품 포도를 넣고 말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저 물을 붓고 다시 그 물을 떠다 주었더니 물이 포도주로 변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대할 때, 단순해 져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 순전해져야 합니다. 세상의 복잡한 법칙과 계산을 복음 속에 넣으려고 하면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지 못합니다. 다시말해 복잡한 생각과 세상적 계산으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성경말씀 그 자체를 읽기만 해도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무슨 신학을 넣고 철학을 넣고 문학을 넣는 것은, 인간의 귀가 간사하고 고급스러워져, 그 귀를 만족시키기 위한 보조 수단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의 수고하고 땀 흘리는 삶 속으로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인생에게 묻습니다. 네 인생의 그물에 고기가 있냐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밤샘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그물이 비어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우리는 옛사람의 경험과 인간적인 자랑과 세상의 교만을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땀 흘리고 수고하는 것들마다, 그물이 가득 차는 축복의 응답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세상 삶에 어이서 영적 삶에도 구원의 풍성한 열매가 맺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